박정은의 계절 ㅡ 아름다운 분노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저는 인도네시아의 한 섬에 사는 청년들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자카르타에 도착해 이틀을 쉬고, 다시 국내선을 세 번 갈아타고서야 플로레스 섬 한가운데 바자와(Bajawa)에 닿았습니다. 청년들은 자기들의 말만 하고, 나는 영어만 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수업을 잊고 그대로 흐름에 맡겨 보기로 했습니다. 옆에서 영어가 되는 청년이 해주는 듬성듬성한 통역을 들으면서요.
그런데 땅 이야기가 나오자, 온순하던 청년들이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빼앗긴 부족의 땅을 되찾으며,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문학과 글쓰기, 예술을 가르치는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춤을 추고, 빼앗긴 땅을 폭행당하는 여성으로 표현하며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현장 학습 때, 내 옆에 앉아 구글 번역기를 돌리며 대화를 나누던 예쁘장한 어린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자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적었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민감한 이야기를 번역기에 대고 무어라 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이 계속되는 수탈의 시대에 인도네시아는 어떤 곳인가, 그리고 이곳의 여성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길에 신들의 섬이라는 발리에 들러 이틀을 지냈습니다. 신이, 자연이, 그리고 사람이 계속 식민화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지상낙원이라는 발리가 너무 낯설고 슬퍼서, 발리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부유한 휴양촌 동네에 오니 번지르르한 비슈누 상과 가루다(비슈누를 실어 나르는 충실한 새) 외에, 유명한 호텔 사이로 멋진 '퍼시피카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건물은 식민지 시대에 동인도 제도의 여성이 타자화된 공간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벌거벗은 여성의 얼굴, 몸, 치부까지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타자의 시선에 갇혀버린 이곳 여성들의 몸이 느껴져 불편해졌습니다. 그곳에는 고갱의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었고, 팔루스를 상징하는 나무 기둥에 그리스도를 새겨 넣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긴 식민의 역사를 지나온 지금의 발리는 여전히 하루 종일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유순합니다. 나 같은 외국인은 싼 값에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지상의 낙원으로 불리는 걸까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 깊이 동의하는 나는, 타자성이 만들어낸 짜증나는 아름다움과 인스타그램이 만들어낸 유사물(resemblance) — 그럴듯해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 에 지쳐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대신 한 주를 함께 보낸 젊은 여성들의 눈빛과 음성을 기억하며 걷는데, 묵고 있는 숙소 옆 골목길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어요. 동남아시아의 골목길은 언제나 시와 같지요. 고요하고, 평화롭고, 배타적이지 않은 위엄이 있어요. 만나는 사람들은 기꺼이 집을 보여주는데, 자연스럽고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잘 가꾼 조그만 마당에는 신을 모신 신당이 있고, 푸르른 숲과 목조 주택, 그리고 기와가 아름다웠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섬들은,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내게 타자성에 대해 친절하게 들려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타자입니다. 이 타자성 속에서 우리는 관계 맺고 살아갑니다. 인종이나 경제력, 성별이 타자성을 만들어가는 요소이며, 거기에 어떤 이미지로 구성된 상상계가 작동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최상의 아름다움이고, 그 아름다움만이 우리의 무너진 인간성을 구원하리라는 조그만 확신을 배우고 갑니다.
그러면서 앞에 언급한 내가 만난 원주민 활동가 여성들의 분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본 화가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들이 보고 싶어졌어요. 그는 화난 여자아이들을 계속해서 그리는데, 현실에 불만한 여성의 얼굴들을 저는 참 좋아해요.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원할 것이고, 그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것은 여성의 분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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